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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향으로 시작된 금요일

금요일에 시간 어때요?

by Melodybae 2025. 4. 18.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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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를 지으며 시골에 사는 할아버지에게는 늘 도시에서 맡아보지 못한 냄새가 났다. 매번 다른 것 같지만 같은 비슷한 냄새. 친가에서는 여자라고 못생긴 과일만 주는데, 외가에서는 언니, 오빠 제쳐두고 나에게만 몰래 군밤 하나 더 쥐여주는 외할아버지가 계셨다. 가까이 올 때마다 할아버지 손에서 나던 향. 그때는 무슨 냄새인지도 모르겠는 시골 냄새가 왜 싫었는지 모르겠다. 외갓집에만 가면 나던 그 냄새. 지금은 맡고 싶어도 못 맡은 할아버지의 체취. 지금 생각해 보면 흙냄새였던 것 같다.

흙으로 지어진 집에 아궁이 불을 때며 더욱 짙어지는 냄새. 밭을 매고 오셔서 거름에 섞인 흙냄새, 나무를 하고 오셔서 풀 냄새가 섞인 흙냄새. 어떤 냄새가 할아버지를 둘러쌓고 있어도 할아버지의 냄새는 변하지 않았다. 늘 흙 내음이 나던 할아버지는 추위를 가장 먼저 깨고 나오는 매화꽃이 피는 다시 흙으로 돌아가셨다.

그 때문일까? 향수를 쓰기 시작하고부터 흙냄새가 나는 향을 찾아 쓰기 시작했다. 아마 나를 유독 예뻐해 주셨던 할아버지가 생각나서겠지. 어릴 적부터 후각이 예민해 향에 민감했다. 여러 향이 혼합돼 있더라도 할아버지에게 나던 흙 내음이 스치면 향수 뭐 쓰냐고 물어보곤 했다. 우디 향을 쓸 때마다 주변에서 이야기했다. 너랑 어울리지 않는 향이라고. 나는 시트러스, 플로럴 향이 더 잘 어울린다고. 할아버지의 밭에서 뛰놀며 자란 나는 플로럴 이런 온실의 공주님에게 나는 향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향들이 더 어울린다니… 그때부터 향수를 아예 잘 쓰지 않게 됐다. 우디 계열의 룸스프레이를 집에서 뿌릴 뿐이었다.

그러다 지난해 봄, 러닝 크루에서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한 친구를 만났다. 러닝 후 땀으로 찌들어 있을 법한데 그 친구가 뿌렸던 향수의 잔향이 남아 있었다. 가벼운 향이 모두 날아가고 묵직하게 남아 있는 향은 우디였다. 처음 만난 잘 모르는 친구지만 나도 모르게 호감이 갔다. 다른 향수 브랜드의 우디 향들보다 짙었다. 평소처럼 무슨 향수 쓰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플러팅 같아서  물어보지 못했다. 그 이후 그 친구가 가까이 오면 퍼지는 향에 ‘왔구나’하며 남모르게 반가워했다.

조금 친해지고는 가장 먼저 물어봤다. “무슨 향수 써?” 그 친구는 “그랑 핸드 솝니, 딥디크 베티베리오, 르라보 베이 19”를 쓴다고 알려줬다. 이후로 그 친구는 나를 만나는 날에는 우디향이 짙은 향수를 뿌리고 나왔고, 나는 늘 좋은 냄새가 난다며 킁킁거리며 친구의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우리는 올해 9월 결혼을 한다. 평생 흙 냄새를 맡을 수 있게 됐다. 이 글을 보는 그 친구는 “나 할아버지야?”라고 웃으면서도 “그래도 네가 좋아하는 거니까 나도 좋아”라고 웃어줄 것을 안다. 늘 나한테 군밤 하나 더 쥐여주며 웃던 할아버지 미소처럼 환하게.

생각해보면 흙 냄새는 절대 혼자 돋보이지 않는다. 해가 강하게 내리 쬐는 날, 비가 오는 날, 태풍이 휘몰아 치기 전 등 흙냄새는 다른 무엇인가 만났을 때 더욱 짙어진다. 누군가 어우러질 때 더욱 짙어진다. 어떤 향이 섞여도 자신의 향을 잃지 않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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