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좋아하냐 물으면 "좋아한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던 시절이 있었다. 히라다 하카의 낮술, 아무튼 술, 아무튼 술집 시리즈 등. 좋아하는 술을 한잔을 기울이며 술과 관련된 소설을 읽다 보면 주인공과 한 잔 하는 기분이다. 하지만 지금은 건강과 가치관의 변화로 술을 끊어가는 중이다. 그래서인지 술에 관련한 책을 발견하면 뭔가 더 반갑고, 꼭 읽고 싶어 진다.
정한아 작가의 '술과 바닐라'는 작가인 친구 집에 갔다가 발겼했다. '친밀한 이방인'으로 좋아하는 작가인 정한아 작가 작품 중에 이런 소설이 있는지 몰랐다. 책을 읽으며 작가를 잘 외우지 못하는데 뭔가 아는 작가라서 그런지, 술과 관련한 이야기라서 그런지, 친구와 오랜만에 술을 먹고 있어서였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책을 빌렸다.
'술과 바닐라'는 결혼한 여성과 술에 관련한 이야기다. 여성 서사를 잘 쓰는 작가라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갔다. 묘한 경쟁의식을 느끼는 순간을 술로 이겨내는 여자. 아이를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하며 생긴 우울감을 술로 달래는 여자. 반대로 아이를 뒷전으로 두고 자신에게만 몰두하며 술로 괜찮다 최면을 거는 여자. 실직과 이혼의 역풍을 맞았지만 술을 마시며 새로운 시작을 도모하는 여자 등. 다양한 이유로 술을 먹는 여자들을 보며 '나는 왜 술을 먹는가' 한 번 더 생각하게 됐다.
술을 줄이기 시작하며 가장 먼저 줄인 술은 화날 때 먹는 술과 혼자 먹는 술이다. 화날 때 먹는 술을 끊은 이유는 '술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기분 좋게 먹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던 아빠 덕분이다.
나는 첫 술을 부모님께 배우지 않았다. 놀기 좋아하다 보니 친구들에게 처음 배웠다. 그러다 보니 감정에 따라 술을 먹는 일이 많아졌고, 사회생활의 연차가 쌓이면서는 기분 좋을 때보다 기분 나쁠 때 술을 마시는 일이 많아졌다. 그렇게 체형과 건강과 정신이 망가져 가던 20대 후반 아빠가 다시 술을 가르쳐 주셨다.
"술은 좋아하는 사람과 더 기분이 좋게 마시는 술이 가장 맛있는 술이다. 화나서 먹는 술은 맛있는 술이 아니라 독약이다"라고.
두 번째 끊은 혼자 먹는 술. 어렸을 때는 막연한 로망이 있었다. 아마 미디어가 만든 로망이겠지? 일 잘하는 워커 홀릭이 퇴근하고 들어와 샤워하고 마시는 맥주 한 캔, 집에서 영화 보며 마시는 와인 한 잔, 혼자 바에 앉아 마시는 위스키 샷. 그게 뭐라고 멋있어 보였다. 드라마에 나오는 와인 셀러, 보이는 곳에 여러 종류의 위스키 진열장. 그게 뭐라고 성공한 어른 같아 보였다.
부모님과 함께 살 때는 내가 술 마시는 것을 싫어하는 엄마 때문에 방에서 혼자 숨겨두고 마셨다. 방에서 상온 보관을 해도 되는 와인과 위스키를 선택했다. 화장실 옆방이던 내방. 씻고 나와서 마시는 온더락과 와인. 성공한 커리어 우먼이라 착각했다. 독립을 하고 나서 친구들은 와인 셀러, 지거 등의 선물을 줬다. 나도 연차가 쌓인 만큼 조금 더 비싼 위스키를 사 모았다. 그리고 빡침이 차오를 때마다 온더락, 진토닉, 하이볼 등 그렇게 술을 만들어 마셨다.
마지막으로 안 먹는 술은 그냥 먹는 술이다. 회식이라 그냥 먹는 술. 별 신기한 술도 없는데 그냥 메뉴판에 있어 시키는 술. 영화, 드라마 등의 콘텐츠를 보며 그냥 먹는 술.
세 가지 이유를 두고 다시 질문한다. ‘나는 왜 술을 마시나’. 이제 술을 안 마신다고 친구들이 놀아주지 않는 대학생도 아니다. 강요를 당하는 회식 문화도 어느 정도 커트할 수 있는 연차의 직장인도 됐다. 내가 술을 마시는 이유는 좋은 사람이랑 더 즐거우려고인데, 즐거운 사람이랑 있다면 술을 마시지 않아도 더 즐거울 수 있다. 물론 함께 마셔 더 즐거운 것도 있지만. 그 기쁨도 누구보다 잘 알지만.
‘술과 바닐라’를 읽으며 술 마시는 기준을 새로 정하게 됐다. 첫 번째,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기쁜 일, 슬픈 일이 생겨 함께 술을 먹고 싶다 할 때. 두 번째, 여행 가서 그 나라만의 술을 싸게 경험할 수 있을 때. 대망의 마지막은 정말 정말 귀하고, 맛있는 술을 만날 때.
이것들도 언젠가 끊을 것 같다는 어렴풋한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게 오늘 당장은 아니니까. “나랑 술 마실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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